명사인터뷰

[Vol.27] “실패할 때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어요”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그 동안의 여러분은 교육 당하고, 평가 받고, 등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여러분은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고, 배우고, 가르치고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소고기처럼 등급을 나누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아는 그 기쁨과 보람과 아쉬움으로 평가합니다.

여러분은 시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창조자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드십시오. 그리고 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에게 배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

검은 망토에 배트맨 가면을 쓴 백발의 연사가 유튜브 채널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연사로 등장했다.‘대학 가지 말고 대학을 만들자’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이는 경기도‘꿈의학교’운영위원장 박재동 화백(66). 그의 강연은 ‘꿈의학교’ 1기생 수료생들에게 직접 전한 위 연설문으로 마친다. 박 화백은 지난 12월 18일 서울형 자유학년제 교육과정인 오디세이학교 명예교장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1980~1990년대를 대표하는 시사 만화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재직 중인 박재동 화백을 1월 3일 꿈트리가 만났다.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박 교수는 정년 이후 시작할 새로운 작품과 꿈의학교·오디세이학교 등을 통해 더 커진 교육에 대한 열정과 설렘을 드러냈다.

■ 만화가 사회악이었던 시절, 재수하며 만화책 1권 그려

박 화백은 만화 가겟집 아들이었다. 만화 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동네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이가 성적이 떨어져도 만화 탓, 아이들끼리 싸워도 만화 탓이었다. 아이를 찾으러 온 어떤 부모는 만화책을 찢으며 ‘남의 자식 망치는 만화장사 천년만년 해 처먹으라’고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TV에 만화책을 불태우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당시 만화는 사회악으로 치부됐다. 주호민 작가의 웹툰‘신과함께’가 영화화 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현 시점과는 대조를 이루는 먼 옛날 이야기다.

“만화는 ‘미래의 문화’였던 겁니다. 제가 어릴 때 만화에 대한 탄압과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백정보다 천시했었죠. 하지만 나는 만화를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했습니다. 아마 수만 권은 읽었을 겁니다.《만화 내사랑》이라는 책을 낼 정도였으니까요. 그 시절 어떤 탄압에도 꿋꿋이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 최강의 웹툰 초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만화와 영화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다. 친구들이 교복 입고 학교 갈 때 그는 입학시험에 떨어져 고등학교 재수생이 됐다. 재수는 그에게 행운이었다. 열일곱 살에 재수를 하면서 시간이 남아돌아 114페이지의 만화책 한 권을 그려낸 것이다.

“그때는 만화 한 권 그릴 수 있다면 재수를 한 번 더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재수가 실패였다면 그 실패는 나에게 행운이었어요. 학교 빨리 가면 뭐 하나요. 뭐든 착 착 착 순서대로 올라가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에요. 실패할 때 진짜 자기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그는 스스로를 타고난 화가라 생각했다. 고교 시절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고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만화가가 될 생각은 못했다. 만화를 배우려면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도제식으로 배워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화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다.

“잠시나마 아버지께서 판검사나 의사가 될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나는 예술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탄식을 했어요. 나는 그림을 안 그리면 살 이유가 없었어요. 예술가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직업이니까요.”

박 화백은 휘문고와 중경고에서 미술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박 화백은 한마디로 ‘이상한 선생’이었다. 미술시간에 종이비행기를 날리기도 하고 중단됐던 축제도 부활시켰다.

“중경고 축제 때 아이들에게 한 달 동안 공동으로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했어요. 누가누가 잘하나를 겨루는 게 아니라 협동해서 작품을 만들어보라 했더니 정말 희한한 작품들이 나오더군요. 첨성대, 큰 책, 영화, 남대문, 점집, UFO, 거북선, 용을 만드는 아이들도 있고 심지어 운동장에 집을 짓는 아이들까지 엄청난 아이디어들이 나왔죠. 그때 제가 ‘아이들은 허락만 해주면 운동장에 집도 짓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미술교사 시절 친구의 권유로‘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 동인에 가입하게 됐다. 이전까지 국내 미술이 꽃과 여인 같은 현실과는 관계없는 것을 그리거나 추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현실과 발언’은 우리 삶과 관계되는 민중미술을 싹틔우는 전기를 제공했다.

‘너무 행복해서’ 교사를 그만둔 박 화백은‘얼떨결에’ 만화가가 됐다고 말한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때 아는 후배의 권유로 시사만화가에 지원했고 덜컥 합격했던 것이다.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소원대로 ‘한겨레에서 8년간 죽어라고 그림 그렸다’고 했다.

 

■ 얼떨결에 만화가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돼있더라

“난 좀 독특한 경우였어요. 만화가가 되려고 만화를 그린 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한 수단으로 만화를 그린 거죠. 해보니까 내가 만화를 잘 그린다는 것을 알았고‘아, 이게 나한테 맞구나’하는 것도 알게 됐어요. 지금도 한겨레신문 아니었으면 만화를 안 그렸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연재한 지 두 달도 안 돼 박 화백은 시쳇말로 완전히‘떴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방송까지 경쟁적으로 그의 만화를 소개했다. 민주화의 열망이 거세지던 시대적 흐름도 있었지만 연예인도 아닌 그가 팬덤을 일으킨 데는 그만의 작품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칸짜리 시사만화에는 원래 말풍선이 없었어요. 말풍선은 아동만화에만 쓰는 것이라 점잖지 못하다고 여겼던 거죠. 하지만 나는 그 한 칸 안에 많은 드라마를 넣어서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동만화의 역동성을 그대로 그려 넣었죠. 또 하나는 뭐든지 눈치 보지 않고 비판했어요. 그래서 시사만화가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역으로 평화로운 날이에요. 예를 들어 최순실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의욕이 불타오르죠.”

8년간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압박감 속 마감을 하면서도 놓치지 않았던 그만의 5가지 원칙이 있었다.‘첫째도 둘째도 팩트, 팩트가 우선이다. 인신공격을 하지 않는다. 비판의 칼자루를 쥐었지만 역지사지할 것. 훗날 역사의 법정에서 내 그림이 과하지 않느냐 물었을 때 당당할 수 있는가. 잘못했을 때는 즉각 사과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그는 스스로를“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느라 바빠서 학생들을 제대로 못 챙긴 미안한 선생”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청년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청년들의 감수성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늙지 않고 꼰대가 되지 않도록 가다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작가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로서 자립할 수 있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소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을 떠난 예술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요.”

20년 전에 비해 학생들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도 내년 정년을 앞둔 그가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이유다.

“예전에는 어쩌다 잘하는 친구가 한둘 나타났는데 지금은 너무 많은 아이들이 잘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등골이 오싹오싹해집니다. 나도 다시 정글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이 친구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선생으로서 두렵기도 하지만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 학생들을 보면 ‘나보다 낫다, 내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차에 내년에 정년퇴직을 하게 돼 너무 좋은 겁니다. 이제는 내가 작품으로 그들에게 도전을 해야 될 차례죠.”

최근 박 화백의 최대 관심사는 교육, 남북통일, 그리고 작품이다. 꿈의학교와 오디세이학교에 관여하게 된 이유도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치며 교육의 중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 교육의 주체인 아이들에게 교육을 맡기자

“얼마 전에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강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너무 버거워 내가 혼자 강의하기보다 아이들에게 함께 토크쇼를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들이 다 바보가 돼버려서 도저히 수업을 할 수가 없다. 여러분들이 교육과정을 만들고 학교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질문을 던졌더니 3개 학교 아이들이 이구동성이더군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반 편성은? 미래의 꿈을 테마별로 그룹을 나누겠다는 것. 꿈을 위해 모였기 때문에 굳이 학년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학교폭력, 왕따 문제는? 학생들끼리 위원회를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가는? 기본적으로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다보면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그냥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과감한 의견들도 튀어나왔다.‘학교에 한꺼번에 다 모일 필요가 있나. 그룹으로 동네별로 만나서 공부해도 되는 것 아닌가. 중학교·고등학교를 꼭 3년씩 해야 하나.’아이들은 앞 다퉈 자신들의 속내를 쏟아냈다.

“아이들의 여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1학년보다 2학년이 잘한다는 전제도 웃기는 이야기죠. 아이들을 등급으로 나누는 것도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짓입니다. 어른들이 자꾸만 좋은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이들을 수동적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우리보다 아이들이 낫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우리보다 나은 게 훨씬 많습니다.”

교육의 주체인 아이들에게 교육을 맡기자는 주장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해준 학업이 아닌 진짜 ‘내 일’을 하는 것이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우리 아이들은 이미 수준이 높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는 지론이다. 어른들은 화두만 던져주고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꿈나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꿈나무’라는 말은 지금 준비해서 나중에 뭐가 되겠다는 건데 그러지 말고 지금 해보라는 겁니다. 미래의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말고 지금 당장 스마트폰으로 찍어보라는 겁니다. 사업에 관심 있으면 초등학교 때부터 돈을 벌어보고, 음악가가 되고 싶으면 가족이나 친구들 앞에서 연주를 해보고, 작가가 되고 싶으면 이야기를 써서 친구들 앞에게 발표를 해보라는 겁니다. 기왕이면 나는 돈을 받고 해보라고 권합니다.”

미래 사회 우리 아이들이 갖춰야 할 역량에 대한 박 화백의 방법론은 단순하다. 지금부터 이것저것 해보는 것. 뭐든 해보다 보면 어디에 꽂히는지 알게 되고 바로 그것이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조언이다. 반드시 어느 분야에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좋고 자신의 적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대부분 농민이던 옛날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 물으면 답이 명확합니다.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즉 생존해서 대를 잇는 것이죠. 그 다음에는 ‘출세해서 가문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뭘까요? 자기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빨리 되는 사람도 늦게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마다 자기를 찾아 자기답게 살아가면 됩니다.”

박 화백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돈과 권력을 위해 뺏고 뺏기고 죽고 죽이며 치달아왔으며 돈과 권력이 아닌 아름다움에 꽂혀서 진실함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라고 말했다. 또 가장 자기답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충분히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바로 신인류라고 덧붙였다.

“미래에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노동을 다 뺏겨 버리면 사람들은 예술을 해야 합니다. 잘 노는 게 예술이고 잘 노는 것의 최고 경지가 독서와 여행이 아닐까요. 그냥 놀기보다 언제나 새롭고 뭔가를 창조해가면서 놀아야 행복하지 않을까요.”

 

◆박재동 화백은… 1952년 울산 출생, 서울대 회화과 졸업, 1974년 등단, 1979년~1987년 휘문고·중경고 미술교사, 1988년 한겨레신문 만평 ‘한겨레그림판’으로 만화가 데뷔, 1996년 애니메이션 감독 오돌또기 대표‘마당을 나온 암탉’제작,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위원장, 2016년 경기도 ‘꿈의학교’ 운영위원장, 2018년 서울시오디세이학교 명예교장.

[글쓴이] 김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