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진로

[Vol.39] “익숙한 얼굴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 팝아트의 진짜 매력이죠”


‘내가 사랑하는 얼굴’ 그리는 팝아티스트 릭 킴(김태훈)씨

 

흔히 팝아트(Popular Art)라고 하면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캔’을 떠올린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나 오브제를 소재로 쓰면서도 강렬한 색과 이미지로 재창조 된 작품은 예술가의 개입으로 인해 익숙한 것들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매력을 선사한다.

앤디 워홀로 인해 우리는 ‘마돈나의 얼굴’처럼 유명인의 얼굴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돈나 같은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팝아트로 표현한 예술가가 있다면 어떨까? 바로 한국의 팝아티스트이자 기획 및 디자이너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릭 킴(39·Rick Kim·김태훈)씨를 ‘내가 사랑하는 얼굴’ 개인전 마지막 날인 12월 2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페이머스 그라운드에서 만났다.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에 주목한 이유에 대해 그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번 보면 다 아는 유명인의 얼굴이 아니라 내 가족, 친구, 연인 등 평범한 얼굴들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사실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작품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얼굴이 전시되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 ‘회사인’으로 10년…재능 발견했던 시간

1999년 전북대 미술대학에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입학했다.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 학생들을 돕는 국제교류부 활동을 하며 외국인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생겼다.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레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훈 씨는 전공 분야 취업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취업한 친구들을 보니 좋아하던 일이 생업이 되다보니 그 일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그래픽 디자인을 좋아했던 그였기 때문에 조금 더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시각 디자인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죠. 그때 A4용지에다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잘 못하는 것, 싫어하는 것, 관심 있는 것 리스트를 쭉 정리해봤어요. 분석을 해보니 제가 미디어 영상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대학 3학년이던 2005년부터 전주지역 민영방송 JTV에 취업해 FD(연출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2년 동안 TV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면서 미디어의 현실적 한계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 즉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방송 제작진들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결국 이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또 한 번 빈 A4용지에 자신을 찾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일본어를 잘 하고 뭔가 일을 꾸미는 것, 즉 기획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재능을 바탕으로 2007년 웹젠이라는 게임회사에 입사해 일본 현지화 개발 PM을 맡게 됐다.

IT 전공자가 아닌 그는 입사 후 첫 회의에서 대화의 절반 이상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평소 게임을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기본적인 용어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6개월 동안 밤을 새워가며 프로젝트에 몰입한 덕분에 일본 발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게임이나 미디어산업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2009년 10월엔 엔씨소프트로 이직도 감행했다. ‘내가 하면 잘할 것 같은’ 포지션의 채용공고가 떴기 때문이다. 게임 기획팀에서 시각적인 부분 전반을 담당하는 ‘비주얼 기획자’로 이직해 리니지2 관련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5년간 일했다.

 

■ 내 안의 아이디어들 ‘사이드프로젝트’로 풀어내다

10년간 ‘회사인’으로 사는 동안 안정적이었지만 마음 한 편으로 즐겁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거나 차곡차곡 메모를 해뒀다. 어느 날 그것들을 어디엔가 풀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다.

2012년 1월 1일 0시 15분. 가까운 친척의 임종을 홀로 지키며 새해 첫날을 영안실에서 맞게 된 것이다. 몇 시간만 병실을 지키면 될 거라 생각하고 간 그로선 엄청난 쇼크였다.

“진지하게 나한테도 내일이 없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날 이후에도 야근 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일상이 계속됐지만 예전과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죠. 이렇게 일만 하다가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만일 죽으면 뭐가 아쉬울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어요.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한 나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래서 이젠 그것들을 세상에 풀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2013년 1월, 회사에 담당 업무 변경을 요구하고 6개월간 대기발령을 받았다. 운 좋게도 일을 하지 않고도 월급을 받게 돼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던 일부터 시작했다. ‘프로젝트 페이스 드로잉(이하 프페드)’, 모르는 사람들의 페이스 드로잉(face drawing)을 그려주는 일이다.

그가 계획한 ‘프페드’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페이스북을 통해 의뢰를 받으면 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모델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한 후 그림을 그린다. 완성된 작품을 페이스북 담벼락에 태그를 걸어 올려주면 끝, 물론 무료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림 그려주기를 좋아하는 태훈 씨의 자발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2월부터 개인 페이스북으로 신청자를 받았더니 반응이 좋았다. 입소문이 나면서 대기자가 200명을 넘어섰다. 100여장이 넘는 페이스 드로잉 작품이 나왔고, 5~6월엔 그의 그림을 본 영국인 친구의 제안으로 온라인 상태의 그림을 캔버스로 출력해 영국 런던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영국 개인전을 계기로 ‘프페드’의 후속 과정이 생겼다. 그림 신청자들에게 캔버스로 출력한 작품의 구입의사가 있으면 판매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판매과정에서 그냥 그림만 전달하는 것은 왠지 그답지 않게 느껴졌다. 청담동 가로수길의 작은 공간을 빌려 그림 신청자들을 초대해 팝업 전시회를 열었고 그를 아는 뮤지션들이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시회는 즐거운 파티가 됐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전시회에 직접 와서 작가와의 만남 후에 그림을 가져가게 했다. 그의 첫 사이드프로젝트 ‘프페드’의 전 과정은 이렇게 해서 완성됐다. 이때부터 태훈 씨는 릭 킴(Rick Kim)이라는 이름의 아티스트로 활동을 시작한다.

2013년 6월 퇴사 후로는 예상치 못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다. 11~12월에는 SK아트센터 나비의 요청으로 미디어아트 ‘얼굴을 만나다, 세상을 만나다-첫번째 이야기전’에 도전하게 됐고, 2014년 10~12월에는 강남구청과 함께 강남 미디어폴 미디어아트 ‘얼굴을 만나다, 세상을 만나다-두번째 이야기’개인전을 진행했다. 여러 번의 그룹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2015년에는 ㈜프리키컴퍼니라는 회사를 만들어 여러 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지만 속도를 내기 위해 무리하게 일하다 실패했다. 2017년부터는 1인기업가로 돌아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프리랜서 그룹과 함께 자유로운 형태로 일하고 있다. 2018년 4~6월에는 카카오페이지와 함께 ‘크레이지 피플(ㅋrazy People)’ 프로젝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저는 현재 기획, 디자인(브랜드 작업), 팝 아티스트 3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하나의 직업이나 전공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저 같은 사람을 프리키(Freekey: 자유로운 열쇠)라고 부릅니다. 저에게 작가 활동은 일종의 미디어, 즉 사람들과 소통하는 수단이지만 아직 작가활동으로 돈을 벌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기획자로 불러줘서 수입 측면에서는 예전 월급쟁이 시절 못지않습니다.”

지난해 11~12월엔 *와디즈로부터 ‘프페드 in Wadiz 프로젝트를 제안 받아 펀딩 목표치를 뛰어넘는 모금액을 달성하기도 했다. 고무적인 점은 작업을 의뢰한 사람들의 90%가 태훈 씨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12월19일부터 25일까지 합정동 페이머스 그라운드에서 ‘내가 사랑하는 얼굴’ 개인전을 개최했다.

“크리스마스이브임에도 이곳 전시 공간이 관람객으로 꽉 찼습니다. 작가로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어요. 세상과 교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살아있는 느낌이 듭니다. 사이드프로젝트로 시작한 ‘프페드’는 지금은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훌륭한 홍보 채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 직업세계의 변화상에 맞춰 적응력 있는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 청소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2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첫 번째는 우리보다 앞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만들어온 훌륭한 것들이 있어요. 흔히 규칙, 전통, 시스템 같은 것들인데 그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과학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시험을 위해서가 아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렇다고 기존의 틀에만 안주하지 말라는 겁니다. 기존의 것을 이해했다면 다음으론 그것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며 그 틀을 깨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와 내 주변이 좀 더 좋아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은 꽤 만족감을 줘요.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즐겁습니다.”

*와디즈(Wadiz): 2012년 5월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기업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분 투자형 크라우드펀딩 회사로, 금융위원회로부터 2016년 1월 정식 인가를 받았다. 와디즈는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투자)과 보상형 크라우드펀딩 (리워드)을 운영하고 있으며, 스타트업과 문화 콘텐츠를 시작으로 식품, 여행 등 펀딩 카테고리를 확장하고 있다.

[글쓴이] 김은혜 에디터